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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으로 완성되는 인간 - 공자의 허와 예수의 케노시스

인문학과 철학

by HtoHtoH 2025. 10. 24.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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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인덕과 그 우선순위

유가의 철학은 성인과 군자의 삶을 이상으로 삼는 만큼, 그 도에 따른 덕의 실천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덕이라 함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어느 한 가지로 제한하여 설명할 수 없지만, 대개 도에 따른 인간 윤리의 실천적 대강이라 말할 수 있을 ㅇ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가르친 수많은 덕목 가운데, 단연 무엇이 우선적인 덕목인가. 이를테면, 덕성의 실천에도 '친소후박'이라는 우선순위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우리는 공자가 가장 중요시한 인의 실천을 뜻하는 인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로 인에 뜻을 두면 악을 행하지 않게 된다"는 공자의 말이 설득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인의 사상을 예수의 아가페 사상과 비교하여 고찰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인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강조되고 있는 '허', 곧 비움의 관점에서 공자의 덕을 새롭게 음미해 보고자 한다. 

 

공자의 무아와 허의 정신

공자에게서 '비움'의 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자한>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자는 네 가지를 절대로 하지 않았다. 사사로운 뜻을 내는 일이 없었으며, 기필코 하겠다는 일도 없었고, 고집부리는 일도 없었으며, 자기를 내세우는 일도 없었다." 이 가운데서 특히 '무아'의 정신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정신이다. 불교의 '무아'와 그 존재론적인 철학적 성격은 다르지만 윤리적 덕행과 관련하여서 볼 때는 상통하는 것으로, 노자의 무위와는 크게 다를 바 없다. '무아'의 정신에는 '비움'의 정신이 있기에, 사사로운 뜻이나 고집을 내세우지 않는다. 모든 비움의 시작은 '사사로운 이익'을 먼저 내세우고자 하는 욕심을 멀리하는 반성적 성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비움으로 다스리는 도

공자의 비움의 사상은 그의 정치학에서도 잘 드러난다. 제자 자하가 노나라 거보라는 작은 읍의 읍재가 되어 정치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속히 성과를 보려고 욕심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보고 탐하지 말 것이며, 속히 하려면 제대로 되지 않고, 작은 이익을 탐하면 큰일을 이루지 못한다." 정치가들은 일의 진척과 성과를 염두에 두고 성급히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폐단이 있다. 이에 대해서도 공자는 자하에게 조용히 인내하며 성과를 기다리고, 큰 뜻을 가지되 작은 이익을 탐하지 말 것 등을 경계하여 가르친다. 공자가 말하는 '비움의 정치학'은 순임금이 보여준 '무위의 정치학'이기도 하다. "인위적으로 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 자는 순임금이신가 보다. 어떻게 다스렸을까? 몸가짐을 공손이 하고 바르게 임금의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인위적인 것을 거부하고 자연스런 다스림을 주장하는 '무위이치'의 사상은 노자의 사상을 대변한다고 할 정도로, 노자의 사상적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공자도 요순시대의 이상적인 정치사상을 무위의 다스림으로 보았으니, 정치에도 비움의 무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자는 제자 자장이 정치에 관하여 물었을 때, 다섯 가지 미덕을 존중하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칠 것을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뜻을 이루고자 하면서도 탐욕을 부리지 않을 것"을 말한다. 이 또한 비움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케노시스의 신학 - 신의 비움과 인간의 구원

성서에서 '비움'을 뜻하는 헬라어는 '케노시스'다. 이 단어는 원래 사물의 '빈'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사람에게 종종 적용될 때는 허영심이 강하거나 경솔한 사람 또는 무익한 것을 가리키기도 했다. 이를테면 자랑이나 '헛된' 말 등이다. 여기서 파생된 말이 '케노독소스'로서 '헛된 영광' 혹은 '자랑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케노독시아', 즉 '자만' 혹은 '기만'을 뜻하는 말이다. 이 같은 '빈' 혹은 '비움'의 의미를 갖는 '케노시스'가 [복음서]에서 사용된 문자적 의미의 용례를 몇 군데 볼 수 있는데, 모두가 '자기를 낮추고 비운다'는 의미보다는 문자 그대로 '없음' 혹은 가지지 못한 '빈'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예수가 포도원의 농부에 대한 비유를 할 때에,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떠났다가 돌아와서 포도원 소출의 일부인 세금을 받으러 종을 농부들에게 보냈을 대 그들이 종을  심하게 폭행하고 '거저' 돌려보냈다는 일화에서, '빈' 즉 '케노스'란 말이 언급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본질상 동일하면서도 그의 영원한 신성을 과시하기 보다는 나약하고 비천한 인간의 형태로 자신을 비우고 낮춘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바울이 강조한 것이기는 하지만, 케노스의 용례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함으로써 단번에 비움의 신학적 의미를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비움의 신학적 의미는 존재 방식의 변화를 뜻한다. 이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가 부유하신 분이지만,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 같은 비움을 뜻하는 케노스가 일차적으로는 사물이나 사람에게 적용되는 용어로써 '빈' 혹은 '헛된'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바울은 그 단어의 동사인 케노우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함으로써, 비움의 신학을 모범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비움으로 완성되는 인간 - 공자의 허와 예수의 케노시스
공자의 허와 예수의 케노시스

인과 사랑의 합일

공자가 거듭 비움의 정신을 강조한 것이나, 예수가 목숨까지 버릴 각오를 하고 자신을 좇으라고 했던 이유도 모두, 역사에 길이 남을 거듭난 참 생명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공자는 비록 개인의 수기를 통해 군자로서의, 혹은 백성의 평안을 위한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비움의 정신을 강조했다면, 예수는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비움의 정신을 강조한 것에 그 차이점이 있다. 하지만, 예수가 심령이 가난한 상태로 이웃을 사랑하며 구제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불완전한 이웃을 치유하는 정신을 거듭 말했던 것은 비록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의도가 있었다 해도, 이 땅에서의 평화적 삶을 위한 것이니만큼 공자가 수기안백성을 위해 역설한 비움의 정신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예수는 메시아로서 이 땅에 왔지만 로마의 정권에 시달리며 멸망해 가는 피압박 민족의 설움 한복판에 등장했다. 그 가운데서도 그는 비움을 통한 사랑의 복음으로 투사가 되어, 자기를 내어주는 '죽음'으로써 살리는 '해방'의 복음을 설파했고, 공자는 멸망해 가는 주나라의 문화와 땅에 떨어진 도의 덕치를 되살리기 위해 '먹는 일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면서, 비움의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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