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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예수의 하늘

인문학과 철학

by HtoHtoH 2025. 10. 2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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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예수의 하늘
공자와 예수의 하늘

고대 중국의 하늘 개념과 그 철학적 층위

공자가 제시하는 하늘 개념은 그 이전의 중곡 고대사상의 '하늘' 개념의 연속선상에 있지만, 특히 공자에게서는 몇 가지 의미상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하늘을 말할 때의 개념이 이미 예수 이전 시대의 '하늘' 개념과 사뭇 달랐던 것과도 같다. 중국 철학자 풍우란은 중국 고대의 하늘 개념을 5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한다. 첫째, 땅과 상대되는 '물질적 하늘'이다. 둘째, 황천상제라는 인격적 '주재의 하늘', 셋째,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하늘', 넷째, 자연의 운행에 따르는 '자연의 하늘', 다섯째, 우주의 최고 원리로써의 '의리의 하늘'이다. 물질적 하늘이란 현대적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무리적 공간으로서의 하늘을 뜻하지만, 특히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하늘 개념은 고대로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는 자연 현상의 신비함과 함께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자의 하늘 경외 사상과 천명 인식

하늘 개념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요약해 보면, 공자는 침묵하는 하늘에  대해서도 인격적 주재성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그러한 측면은 다음과 같이 군자가 지녀야 할 세 가지의 경외를 언급하는데서 더욱 두드러진다.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군자는 세 가지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 천명을 두려워해야 하고, 위대한 성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한다." 천명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늘이 만물과 인간에게 부여한 도의 이치요 덕성이다. 그러한 하늘의 도를 깨닫지 못하고 하늘의 명을 어기며 사는 것은 소인의 처사라고 경고한다.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위대한 성인을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라고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제 공자의 하늘경외사상은 확연히 드러났다. 하늘을 경외하지 않는 것은 성인이나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모독이다.

 

하늘의 인격성 논쟁

학자마다 공자의 하늘사상을 달리 해석한다. 공자가 하늘에 인격성이나 주재성을 부여했느냐,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하늘에 인격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 약간 우세를 보이는 듯하다. 아마 공자는 정치 사상가였지, 종교 사상가는 아니었다는 주장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자가 하늘에 인격성을 부여했는가 부여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는 공자 자신의 입장으로 들어가 보기 전에는 명확한 답을 얻을 길이 없다. 다만 그의 말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말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금까지의 논의만으로도 당연히 하늘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공자의 하늘 개념이 외재적 하늘의 인격성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반성해 보는 도덕적 반성의 거울로서의 '하늘'이라는 상징성만을 주장한다면,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 개념의 외재적 인격성이냐,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 비추어진 하늘의 내재적 인격성이냐 하는 논의로 압축해 본다 하더라도, 공자는 여전히 '하늘'에 대한 공경을 버리지 않고 '하늘' 무서운 줄 알고 살아야 한다는 역사 내외적인 초월적-도덕적-정치적 심판의 함의가 모두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의 하늘

예수는 '하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다시 말해서 예수의 하늘은 무엇인가? 하늘은 원래 헬라어로 '우라노스'라는 말로서 펼쳐진 창공으로서의 '하늘'을 포함한 그 밖의 다양한 수사적 묘사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예수 이전의 그리스의 신화적 작가 호머에 따르면 하늘은 '신들의 거처'로 묘사되기도 하고, 완전한 우주와 절대성을 말하는 플라톤의 하늘 개념도 '우라노스'라는 같은 개념을 쓰고 있다. 따라서 하늘의 헬라적 용어는 물리적 창공으로서의 하늘과, 신화적 혹은 상징적 개념으로서의 하늘을 비유적이거나 신성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호머에 있어서 하늘은 '우주론적' 의미를 지니며, 하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원형으로서, 우주와 동일시되었다. 플라톤에게서 하늘은 존재에 대한 절대적 지식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구약성서의 전통에서 하늘, 곧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하늘 개념은 히브리어로 '샤마임'이다. 이는 처음에 바람들, 기둥들과 함게 기초한, 고정된 어떤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샤마임'은 고정된 '창공'의 의미를 지닌다. 그 하늘 위에는 천상의 바다가 있는 것으로 상상되었다. 그 바다에서는 비로 축복을 주거나 홍수로 저주를 내릴 수도 있다. '하늘의 날들'이라는 표현은 계속되는 기간을 뜻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우주관은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물로 구성된 것으로 보았다. 시적인 비유로는 하늘은 거주할 천막이며, 펼쳐진 두루마리다. 이 같은 개념의 하늘은 모두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그곳은 성소의 법궤와 같이 하나님이 거하는 처소이기도 하다. 고대 근동지방의 관념에 의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참된 거처이고 법궤는 일시적인 현현의 장소다. 

 

두 하늘의 만남

이상에서 우리는 공자와 예수의 하늘 개념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공자가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했던 것처럼, 예수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했다. 공자가 하늘을 인격적으로 지칭한 것은 하늘의 주재성 때문인데, 이를 두고 공자가 하늘에 인격성을 부여했느냐 부여하지 않았느냐의 논의를 하기 전에 공자가 '하늘'을 향하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늘'이 부여한 천명을 깨달아 살기를 원했던 만큼, 그에게서 하늘은 '절대적' 존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부여해 주었다."는 말 한마디를 통해서 보더라도 공자의 하늘 사상에는 인격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의인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애써 공자의 '외천명' 사상을 거절할 까닭이 없다. 물론 공자에게서 하늘은 길흉화복을 점치는 미신적 하늘이 아니다. 비록 하늘 공경이 내 마음에 비추어 본 반성적 거울로서의 '하늘'일지라도 그 하늘은 여전히 인격적인 존재로 남는다. 그것이 물리적 하늘이 아닌 추상화된 하늘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하늘'은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신비롭기에 유한하고 상대적인 인간에게 절대성을 부여할 수 있는 가치가 있지 않을까? 비록 공자 자신은 신비를 외면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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