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우리는 공자와 예수의 비움과 나눔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이제 그 연속선상에서 비움과 나눔을 통한 '사귐'을 고찰해 보자. '비움-나눔-사귐'을 하나의 삼위일체적 구조로 파악해 본다면, 비움은 본체요, 나눔은 쓰임이며, 사귐은 비움-나눔의 모습이다. 이러한 비움-나눔-사귐의 철학으로 우리들의 삶과 세계를 바라볼 때, 비움은 인식론의 출발점에 해당되고 나눔은 가치론에, 사귐은 존재론에 해당될 것이다. 이를 다시 진, 선, 미의 관점에서 본다면 비움은 진으로서의 참의 세계가 되고, 나눔은 선으로서의 착함에, 사귐은 미로서의 아름다움에 해당되지만, 각각의 셋은 하나가 되어 서로를 보충하며 조화롭게 한다. 한편, 이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비움은 이론, 나눔은 실천, 사귐은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비움의 세계는 형이상학적인 '한'의 세계를 구가하고, 나눔의 세계는 땅의 '삶'의 차원을 이루며, 사귐은 이 둘이 어우러진 '멋'의 풍류 세계를 표방한다.
이를 동양적인 사고체계에 대입해 볼 때, 비움은 도의 세계요, 나눔은 덕의 세계며, 사귐은 락의 세계다. 그리고 비움이 '믿음'이라는 신념체계의 범주에 속한다면, 나눔은 '소망'을 이루고 사귐은 '사랑'의 세계를 구축할 것이다. 이로써 비움-나눔-사귐의 철학은 체-용-상의 구조를 띠고, 인식론-가치론-존재론의 철학적 영역을 아우른다. 그리고 진-선-미의 양식을 갖추면서 이론과 실천 그리고 예술이라는 측면과 한, 삶, 멋의 풍류도를 이루고, 도와 덕과 락이 어우러지면서, 신-망-애라는 삼위일체적 구조를 형성하여 아름다운 평화의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비움-나눔-사귐의 삼위 일체적 구조는 그리스도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독특한 역할과 지위 속에 드러나는 삼위일체와 신망애적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부의 자기 비움이 창조 속에 드러나 있고, 성자의 탄생과 삶,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모두 비움-나눔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성령은 성자 예수의 죽음 이후에, 공동체에 사귐을 불어넣어 주는 에너지로서의 입김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창조와 구원의 관계 속에서 믿음, 소망, 사랑은 연속적이며 일체적인 구조를 가지게 된다. 불교에서도 불, 법, 승의 삼보라는 체계를 통해 삼위일체적 구조를 엿볼 수 있다. 궁극적 깨달음에 이른 불의 세계는 법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실체가 승이기 때문이다. 유교에서도 삼위일체의 구조는 예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천, 지, 인의 합일이 유가의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비움과 나눔의 연속선상에 있는 '사귐'의 문제를 공자와 예수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공자에게서 사귐은 '벗'과의 만남에서 두드러진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공자의 이 말속에는 학문하는 즐거움과 벗과의 사귐의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기쁨이 함께 드러나고 있다. 공자가 기뻐한 몇 가지 가운데 우선적인 것은 학문이요, 그다음은 벗이었다. 이때의 벗은 학문하는 벗, 곧 함께 인생 수업을 하는 동문수학자를 말한다. 이른바 도반과 함께 인생을 논하며 사귀는 것이 큰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벗과의 사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신의가 있어야 한다. 공자의 제자 증자는 "벗과 더불어 사귐에 있어서 신실하지 못한 점이 없는가?"를 날마다 반성하였다고 한다.
예수는 사귐의 방식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그것은 억압과 지배가 작용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화로운 사귐이 있는 공동체였다. 적어도 그가 허입한 제자단은 원시공동체로서 나눔과 사귐의 이상을 보여주는 평등공동체였다. 그들은 종래의 직업을 포기하고 자신의 가족 곁을 떠났다. 다군다나 자신의 소유를 모두 포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바로 이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한 비움-나눔의 첫 관문이었고, 일단 제자단에 들어오면 모두가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사귐이 있게 된다. 그것은 결단하는 자들 가운데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다. 이 하나님의 나라인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온 세상의 백성이 새로운 어머니, 형제와 자매의 가족으로 거듭 탄생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가족공동체 안에서 과거에 잃어버렸던 자유와 평화를 '백배'나 되찾는다."
사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진실'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자도 외면한 몇 가지 가운데, "뜻은 크지만 정직하지 않고, 무지하면서도 성실함이 없으며, 무능력하면서도 신의마저 없다면 그런 사람은 도무지 알바 아니다."라고 했다. 사람의 됨됨이를 말할 때 학식과 능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정직과 성실과 신의가 없다면 함께 벗으로서의 도반이 되기가 곤란하다는 것을 공자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빛 가운데 거할 것인가, 아니면 어둠 가운데 거할 것인가, 진리 편에 설건인가, 아니면 거짓 편에 설 것인가, 바로 이것이 '사귐'의 축제의 마당에서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움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어둠이 눈을 멀게 하였다는 요한의 진술은 마치 불교에서 무명이 인간의 해방을 방해하고 고통과 윤회의 속박으로 계속 가둔다고 하는 이치와 같다. 빛은 진리의 세계요, 어두움은 거짓의 세계다. 사랑과 평화의 축제 속에서 하나가 되는 사귐은 빛과 진리의 세계에 속하지만, 증오와 분쟁을 통한 분열과 편당은 거짓과 어둠의 소치다. 사랑은 미움을 극복한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다.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한 요한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증오의 감정은 사귐을 방해하는 첫걸음이다. 바로 이러한 증오를 넘어서 사랑과 용서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정의하는 사귐이란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궁핍한 자에게 재물을 나누어 주는 나눔이요, 진리인 하나님의 무한한 품속에서 베풀어지는 용서와 회개가 있는 화해의 축제로서의 사귐이다. 탐욕과 분쟁을 넘어 '비움-나눔-사귐'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사랑과 평화의 축제에서 함께 만나야 한다. 공자가 원했던 '사해의 형제'나 예수가 원했던 '하늘나라의 가족'이 모두 그러한 사랑과 평화의 축제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공자와 예수도 그런 사귐의 축제의 자리에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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