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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의 '지'가 만나는 자리

인문학과 철학

by HtoHtoH 2025. 10. 24.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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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지'의 두 차원

공자에게서 지, 곧 앎은 무엇일까? 그에게서 지는 크게 '생리지지'와 '학이지지'로 구분된다. '생이지지'란 태어날 때부터 알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학이지지'란 글자 그대로 배워서 아는 지식을 말한다. 이렇게 태어나면서부터 알 수 있는 능력은 서양 철학자 칸트가 말하는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주어진 선험적 인식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학습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인 학이지지를 칸트의 인식론을 통해 설명하면, 감각기능과 오성의 작용을 통해 얻어지는 이성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에게서 학이지지는 단순한 이성적 정보에 국한되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철학적 인식이라는 점에서 도덕적 지식이며, 수양의 학문으로서의 독특한 특성을 지닌다. 이것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자유와 행복 등을 다루는 도덕철학으로서의 실천적 지식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지식은 어진 삶을 위한 지혜와 지식이며,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적 깨침의 성격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도를 이루기 위한 내면의 겸허한 성찰이기도 하다. 

 

해방의 철학으로서의 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는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전제이자 관문이다. 그리고 지는 깨달음의 과정이기에 지혜와 상통한다. 이러한 실천적 지식으로서의 지혜는 때와 시대의 구분 없이, 그 시대와 인간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생성적인 미래를 열어가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으로서의 지는 단순히 계몽적 성격을 넘어서 해방과 실천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종교성과 결부될 때는 구원론적 지식, 또는 지혜로서의 깨달음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지의 출발이 인식의 영역에서 비롯되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 행위의 도덕적, 실천적 해방을 위한 학문으로써 기능할 때, 지는 인간 해방의 소중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논어]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지와 학문은 과연 무엇일까? 공자가 말하는 지로서의 학문, 곧 '배움'은 지혜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가급적 [논어]에서 말하는 지와 학문을 총괄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공자의 정치철학적 지

공자는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지 또는 학문을 언급하고 있다. 우선 지의 정치 철학적인 의미부터 살펴보자. 한 번은 제자 번지가 '앎'에 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사람이 지켜야 할 의로움을 위해 힘쓰고, 귀신에 대해서는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면 지혜롭다 할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의미의 '민'을 '백성'으로 해석하면, 백성의 정의를 위해 힘쓰는 것이 지혜라는 뜻이 되며, 이때의 지는 다분히 정치 철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는 공자와 제자 번지의 다른 대화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공자가 "지는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자, 번지가 선뜻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시 되물었다.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른 사람을 등용하여 잘못된 사람 위에 두면, 잘못된 사람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안다는 의미의 '지'는 정치적 인물의 등용과 관계된다. 그것은 인간의 바른 삶을 제도화하기 위해, 바른 인간을 정치적 위치에 등용하는 식별능력의 의미로 쓰였다. 이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지'이지만, 더 나아가 사람뿐 아니라 사물을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현명함에 대해서도 공자는 말하고 있다. "서서히 녹아들게 하는 교묘한 참소와 피부에 와닿는 듯한 간절한 하소연에도 잘못 넘어가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이다."

 

동서의 '지'가 만나는 자리
동서의 '지'가 만나는 자리

예수의 '앎'과 구원의 인식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짧은 예수의 말은 진리와 인식과 자유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함께 삼위 일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진리의 문제는 존재의 차원이고, 인식의 문제가 깨달음의 인식론적 차원이라면, 자유는 깨침 이후에 얻어지는 가치의 문제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선언은 존재와 인식과 가치의 문제를 모두 내포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 자유와 더불어 초월적, 신적 자유를 동시에 지닌다는 점에서, 예수의 '진리 인식'은 공자의 지 또는 지혜의 차원과 다른 면이 있다. 예수의 진리 인식은 현실적으로 포로 됨에서 벗어나는 자유일 뿐 아니라, 율법에서의 해방과 일체의 모든 속박에서 자유를 얻는 것, 즉 구원을 얻는 것과 결부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자신이 구원자로 나타나기 때문에, 진리 인식은 예수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 자신은 자신을 추종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묻는다. 이에 제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예수는 베드로의 이러한 답변에 대해 칭찬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한, 혹은 '깨닫게' 한 이는 인간적 지식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가 알려준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하늘의 계시적 지식에 속한다는 뜻이다. 예수는 구원자, 즉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진리 그 자체라고 선포된다. "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리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고 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예수를 '아는' 문제는 아버지, 즉 하나님을 아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과연 알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다. 그럼에도 예수가 하나님을 안다고 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아는' 지혜

예수에 대한 인식은 진리에 대한 인식이며, 동시에 구원자에 대한 인식으로 자유를 얻는다는 신앙적 공식이 성립되고 있다. 이때, 과연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지만, 예수는 의외로 간단하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하나님 이해의 지평을 풀어준다. 그 열쇠의 비밀은 물론 이성적 이해라기보다는 신앙적 이해이긴 하지만, 대단히 논리적인 일면이 있다. 문제는 예수가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계시자임을 믿느냐 하는 신앙적 결단이 요청된다는 점이다. 그 문제가 해결되면, 예수 이해는 곧 하나님 이해와 직결된다는 주장이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 또한 이것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영생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이싿. 영생은 바로 "예수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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