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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인과 예악 - 사랑과 질서의 조화로운 길

인문학과 철학

by HtoHtoH 2025. 10. 2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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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인과 예악 - 사랑과 질서의 조화로운 길
공자의 인과 예악

인에서 시작해 인으로 끝나는 공자사상의 근원

공자의 사상은 인에서 출발하여 인으로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은 공자사상의 알파요 오메가인 셈이다.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여, 예에 노니는 것"을 군자의 이상으로 삼은 공자의 이 같은 말과, 인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한 몸 죽어도 좋다는'살신성인'의 정신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인은 모든 행위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중심축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는 공자사상의 핵심임에 틀림이 없다. 이를테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표현도 인에 대한 깨달음과 그것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그 타고난 도리로서의 인을 실현한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 됨'을 실현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이 같이 소중한 사람의 도리로서의 인의 특징은 무엇일까?

 

인의 근원, 외부가 아닌 내면의 결단

[논어]에서 인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그의 제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특히 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인을 버리거나 어겨서는 안 된다. "밥 먹는 짧은 순간에도 인을 어기지 말아야 하며, 급박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인에 근거해야 하며, 위태롭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인에 근거하여 행동해야 한다." 이처럼 인자, 곧 오진 사람은 어떠한 위급한 상황에서도 인을 떠나지 않지만, 동시에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근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인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공자는 인이 멀리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인은 멀리 있는 것인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면, 곧 인이 다가온다." 문제는 인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인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마음속에 작용하는 그 순간, 인은 이미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이 나타나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인과 예악의 상호관계

인은 예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와 악은 인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어떻게 예를 행하며,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악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사람이 근본적으로 타고난 어진 생각을 버리고 질서를 무시하며 어른을 몰라보는 것은 물론, 사람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는 행위는 가히 예의에 어긋난 것이다. 또한 제 아무리 고운 목청으로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춘다 해도 어질고 착한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그 노래와 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공자는 과거 주나라 시대의 찬란했던 물화를 흠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를 거울로 삼았기에 문채가 찬란하게 빛나므로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공자가 주나라의 문화를 따른다는 것은 주나라의 에와 악을 따른다는 것이다. 주나라 문화의 예약 정신은 본래 주 왕실의 혈연관계를 근거로 하여 종법적인 가족 간의 사랑의 정신에 기반을 둔 것이었는데, 공자는 이 사랑의 가족정신을 전 국민에게 확대하고자 했다. 임금 자리를 놓고 친족이나 제후들이 쿠데타와 살육전을 벌이는 무질서한 상황에서 공자는 어질지 못한 인간이 어찌 예를 말하며 음악을 운운하는가 하고 말하는 것이다. 

 

예와 악의 본질

다음과 같은 공자의 말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예로다 예로다 하고 말들 하지만, 그것이 옥이나 비단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음악이다 음악이다 하고 말들 하지만, 그것이 종과 북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이 말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잠시 살펴보자, "공경하면서 옥과 비단으로 받들면, 예가 되고, 조화하면서 종과 북으로 나타내면 악이 된다. 근본을 빼놓고 오직 그 말단만을 일삼는다면, 어찌 예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악에 대한 주자의 간단명료한 해석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의 사상적 스승인 정자의 해석을 들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정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는 하나의 질서일 뿐이며, 악은 하나의 조화일 뿐이다. 다만 질서와 조화 이 두 글자가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질서와 조화가 예와 악의 요체라는 것이다.

 

사랑과 질서의 통일, 인의 실천으로 완성되는 예

천하의 모든 것들이 질서와 조화를 갖추게 되는데, 질서와 조화가 무너지면 근본이 어지럽게 된다. 봄이 겨울로 거슬러 갈 수 없듯이, 예에도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인의 실천 또한 마찬가지다. 인, 즉 사랑과 어진 마음이 없이 아무리 예를 운운하고, 음악을 말하며 노래한들 그것은 형식적인 겉치레에 불과할 뿐이다. 인은 이처럼 예와 악을 통하여 질서와 조화 속에 드러나며, 이러한 예가 서지 않은 인, 또한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질서로서의 예는 과연 인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예는 인의 드러남이다. 인, 즉 사랑이 알맹이라면, 예, 즉 질서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인과 예의 관계를 사랑과 질서의 관계로 바꾸어 설명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질서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다. 사랑의 감정은 흐르게 마련이며 이때의 흐름을 질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질서의 위배이며 폭력이다. 사랑이라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에는 아름다운 조화와 율동이 있기 마련이며 이러한 조화와 율동이 바로 악이요 풍류다.

 

인, 타자를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완성되다

사랑으로서의 인은 본질상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타자중심적이다. 예컨대 인이나 아가페는 이타적 사랑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제자 안연이 인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만이라도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를 실천하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을 행하는 것이 자기로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 말미암는 것인가?" 주자는 예에 대해 설명하기를 "자연의 이치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형식"이라 했다. 결국 자신의 사사로운 욕망을 물리치고 하늘과 이웃을 향하여 선한 마음을 품는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예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공자는 인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묻는 제자 안연에게 다음과 같이 예의 문제로 말한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 것이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도 말아라." 그야말로 불교에서 신, 구, 의로 범하게 되는 세 가지 독을 피하라는 엄격한 교훈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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