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사상의 핵심이 인에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 인의 한자 풀이가 '사람과 사람 둘' 사이의 관계를 뜻하고 있다면, 인이야말로 인간관계의 가장 중요하고 원초적인 개념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다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을 일컬어 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서는 [논어]에서 말하고 있는 인의 또 다른 측면들을 살펴볼 것이다. 우선 [논어] <학이> 편을 보면, 공자의 제자로서 공자보다 나이가 43세나 아래인 노나라 사람 유자가 인의 근본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자가 말했다.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근본이 확립되면 인의 도리가 생겨난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공경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이 같이 인을 해석하는 유자의 이야기를 두고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지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공경하는 것이야말로 인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하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난세를 배경으로 하는 공자와 그의 시대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다만, 유자의 말 속에는 아래로부터 일방적으로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동생이 형을 깍듯이 공경해야만 인의 근본을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될 오해의 소지가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임금은 신하를, 부모는 자식을, 형은 동생을 자비와 관용으로 대하는 것, 또한 인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는 위를 공경하되, 위에서는 아래로 사랑을 베푸는 관계에서야말로 온전히 인이 실천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효와 제는 인을 실천하는 하나의 근본이지만 인의 본질 그 자체로 제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효와 제 이외에 어떤 것이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람이 처한 입장에 따라 인을 실천하는 모습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임금이나 제후가 인을 실천하는 방편에 대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를 다스릴 때는 일을 공경하고 미덥게 하며, 쓰는 것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되 때에 알맞게 해야한다." 이는 임금이나 제후 또는 나라의 일을 맡고 있는 중요한 관직의 사람들의 일을 대하는 자세가 경건하고 신중해야 할 것과, 사치와 낭비를 멀리하고 사람을 자비와 관용으로 대해야 할 것이며, 백성을 동원하여 나라 일을 시킬 때에는 바쁜 농사철을 피하고 농한기를 택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중요시되는 덕목은 경건과 신의, 절약과 사랑, 그리고 때에 맞는 노동이다. 이 다섯 가지를 다시 압축하여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단연 사랑과 미더움이 아닐까? 사랑 속에는 경건과 아낌과 보살핌이 있다. 그리고 미더움은 사랑의 또 다른 한 측면이다. 결국 언급한 다섯 가지 덕목은 모두, 사랑 또는 인이라고 하는 하나의 덕목에 고스란히 담겨진다.
그리스도교에서 사랑, 곧 아가페의 출발점은 하나님이다. 요한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 사랑의 당체에서 예수가 사랑으로 탄생하고, 사랑으로 살다 죽고 또 사랑으로 부활했다. 예컨대, 예수는 사랑의 화신이었고, 또 영원한 화신으로 거듭하여 다가온다. 그렇다면 무엇이 예수를 사랑의 화신이 되게 했을까? 그것은 영원한 침묵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성령을 통해 그에게 다가왔다. 예수가 공적활동을 시작할 무렵, 세례 요한을 통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확신을 받게 되었고, 광야에서 영적 시험을 받아 마귀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 후 고향 나사렛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을 읽을 때,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다. 예수는 회당에서 이 글을 읽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하면서, 바로 이 예언의 글이 자신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회중에게 밝히고 있다. 안식일에 나사렛의 회당에서 읽은 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과 그 내용의 예언적 성취가 바로 예수 자신에게서 성취되고 있다는 이 선언은 신학적으로, 혹은 예수의 생애와 사상적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선언적 의미를 가진다. 예수의 극적인 삶과 죽음은 바로 이 회당에서의 선언을 성취하고자 했던 사명감에서 비롯된다. 그 사명감은 하나님의 뜻의 성취였고, 그것은 또한 신적 사랑의 행위인 아가페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향한 '신적 사랑'은 예수 자신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이는 공자가 말한 '살신성인'의 정신에 비교된다.
공자가 젊은이들에게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라"라고 한 것은 비단 젊은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특히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서, "백성들에게 인은 물보다 불보다 더 좋은 것"이라면서, "물이나 불에 빠져 죽는 사람은 있어도 인에 빠져 죽었다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하다가 죽을 수는 있어도, 사랑하다가 '죽임'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는 인간을 사랑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육체의 가둠'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사랑의 힘으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사랑과 인은 멀리 외부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 인을 실현하고자 하면, 그 인은 바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인의 실천은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공자는 거듭 말한다. "인을 실천하는 것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지 남에게 달려 있지 않다."
그리고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예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으로 간단하게 요약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다." 서로 사랑의 계명은 상호적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나의 주관적인 사랑의 결의이지만, 결국은 서로 사랑의 단계가 가장 이상적인 단계가 된다. 서로 사랑의 경지, 거기에 이를 때, 이 땅은 예수가 이야기하는 천국이 될 것이다. 사랑의 마음, 곧 어진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어질지 못한 사람은 빈궁한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할 뿐 아니라, 즐거움도 오래 누리지 못한다." 반면에, 어진 사람은 늘 어진 생각과 행동이 편안하기 때문에 빈궁하거나 풍부함에도 늘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빈궁함보다 안락함을 원하면서도 어질게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하여 어진 삶을 선택한다. 공자가 자로에게 여러 가지 덕목을 말하는 가운데, "인을 종아해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우둔하게 된다"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수는 말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다." 이제부터라도 '서로 사랑'을 배우자. 인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듯이, 사람을 살리는 '관계의 미학'으로서의 인과 아가페를 배우고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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