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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예수의 평화철학

인문학과 철학

by HtoHtoH 2025. 10. 2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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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속 평화의 언어와 의미

공자는 [논어]에서 “평화”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화'의 개념을 중심으로 조화와 균형의 삶을 강조했다. [논어]의 <학이>, <자로>, <계씨> 편에는 각각 화평의 원리가 언급되어 있으며, 특히 “예를 행함에 있어 조화를 귀히 여긴다”는 말은 공자의 제자 유자의 언설이지만, 공자의 윤리관을 반영한다. 공자 자신은 <자로> 편에서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라고 말했다. 이는 군자는 조화를 추구하되 맹목적인 동조에 빠지지 않고, 소인은 무리 속에서 융합되지만 진정한 조화를 이루지 못함을 뜻한다.
이 구절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지침을 넘어, 공자의 평화론의 핵심을 구성한다. 즉, 진정한 평화는 무비판적 일체감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한 상호 존중의 상태이며, 이는 오늘날의 사회적 다양성 속 평화론으로 확장 가능하다. 공자는 ‘화’를 단순한 정서적 안정이 아니라, '도'에 합당한 질서로 보았다. 그러므로 [논어]에서의 화는 인, 예, 의와 긴밀히 연결된, 도덕적 조화의 상태로서의 평화라 할 수 있다.


태평천하의 이상과 수기의 논리

공자의 평화 이상은 [대학]의 팔조목—“격물치지, 성의정심,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드러난다. 여기서 ‘평천하’는 단순한 국가적 안정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수양이 사회와 세계 질서로 확장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공자에게 평화는 외적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내적 덕성의 확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윤리적 구조였다.
그에 따르면,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닦고, 그 수양이 가정을 다스림으로 이어지며, 그 후에야 국가를 다스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 즉, 내면의 평화 없이는 사회적 평화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 정치철학에서 말하는 ‘공적 합리성’보다 훨씬 포괄적인, 도덕적 공공성의 형태를 지닌다.
따라서 공자의 태평천하는 단순히 무분쟁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수양이 사회 전체의 안정과 조화를 이루는 "윤리적 우주질서"의 구현이었다. 이 점에서 공자의 평화 개념은 근대적 ‘정치적 평화’보다 훨씬 더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이다.

부쟁의 미학과 예의 질서

공자는 평화의 실현을 ‘부쟁’의 덕목에서 찾았다. 그는 “군자는 다투지 않는다”고 하며, 유일한 예외로 활쏘기를 예로 들었다. 활쏘기는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예절과 절제의 훈련을 통해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평화적 경쟁의 상징이었다. 서로 절하며 사양하고, 활을 쏘며, 승패를 인정한 뒤 함께 술을 나누는 행위는 곧 예를 통한 화평의 구현이었다.
공자가 예와 악을 병행하여 가르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는 인간관계의 질서를 바로잡는 규범이고, 악은 마음을 조화시키는 감성의 수단이다. 이 둘이 결합될 때 비로소 사회적 평화가 완성된다. 즉, 예는 외적 평화를, 악은 내적 평화를 형성한다. 공자는 이 두 가지를 통해 인간의 본성에 내재된 다툼의 충동을 제어하고, 조화로운 경쟁과 상생의 문화를 강조했다.
결국 ‘부쟁’은 소극적 회피가 아니라 적극적 절제의 미학이며, 인간의 내면적 윤리의식이 문명적 질서로 변환되는 과정이었다. 공자는 이를 통해 폭력이 없는 질서, 즉 예를 통한 평화사회를 구상했다.

내면의 평화와 사랑의 윤리

공자는 평화의 근원을 외적 제도나 권력의 조정이 아니라, "인간 마음의 정화"에서 찾았다. 그는 “용기를 좋아하되 가난을 싫어하고, 사람이 어질지 못함을 미워하면 난을 일으킨다”라고 경계하였다. 이는 사회적 혼란의 원인을 외부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찾은 것이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과 관용이 필수적이며, 그것이 결여되면 다툼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공자는 수기 없이는 평화를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기를 닦아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단지 개인의 도덕 훈련이 아니라, 타인을 평안케 하는 실천적 행위였다. 공자는 “수기이안인”—자기를 닦아 남을 편안하게 함—을 통해 평화를 사회 전체의 구조로 확장하였다.
그에게 평화는 무사태평의 상태가 아니라, 윤리적 긴장 속의 안정이었다. 인간의 내면이 선(善)에 합치될 때, 사회는 자연스럽게 화평에 이른다. 이러한 평화관은 현대 심리학이 말하는 ‘내적 일관성’과도 맞닿는다. 즉, 외적 평화는 내면의 평정 없이는 지속될 수 없으며, 진정한 평화란 자기 수양의 결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윤리적 상태였다.

예수의 화평론과 ‘깨달음의 검’

예수의 평화관은 공자의 윤리적 평화론과 닮아 있으면서도, 더 급진적인 실천성을 내포한다. 그는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며, 평화를 단순한 감정이 아닌 신적 존재성과의 합일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선언한다. 이는 역설적 표현으로, 무지와 불의에 맞서는 각성의 상징이다.
예수에게 ‘검’은 폭력의 도구가 아니라, 진리와 정의를 세우기 위한 ‘반야의 검’이었다. 그의 평화는 무조건적 순응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투쟁 속의 평화, 즉 비폭력적 저항의 평화였다.
예수는 경제적 욕망(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 종교적 권위(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 정치적 지배(천하만국을 주겠다는 시험)의 세 가지 유혹을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평화가 권력이나 부에서 오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공자의 “군자는 의를 귀히 여기고 이익을 탐하지 않는다”는 가르침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결국 예수의 평화는 자기희생과 이타적 사랑, 곧 십자가의 평화로 귀결된다. 그는 피 흘림 없는 투쟁, 즉 ‘무혈의 평화’를 실현한 인류의 화평자였다. 공자가 예를 통해 경쟁을 제어했다면, 예수는 사랑을 통해 폭력을 해체했다. 두 사상 모두 평화를 ‘자기 수양의 완성’으로 이해한 점에서 공명한다.

내면의 혁명으로서의 평화

공자와 예수는 시대와 문화는 달랐으나, 평화를 외적 제도가 아닌 내면의 도덕적 혁명으로 이해했다. 공자는 화이부동의 정신을 통해 다양성 속의 조화를 강조했고, 예수는 사랑과 용서를 통해 불화 속의 화평을 실현하려 했다.
현대의 경쟁적 사회구조 속에서 평화는 더 이상 외부의 보장으로 주어질 수 없다. 평화는 스스로의 내면을 다스리는 사람, 곧 ‘군자’와 ‘화평케 하는 자’로부터 시작된다.
공자의 말대로 “분배가 균등하면 가난이 없고, 서로 화평하면 부족함이 없으며, 평안하면 나라가 기울지 않는다.” 예수의 말대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두 가르침은 모두, 평화는 타인에 의해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삶의 태도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평화의 사도가 되는 일이다. 그 길이야말로 인간이 스스로 군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서는 길이다.

 

공자와 예수의 평화철학
공자와 예수의 평화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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