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군자의 마음가짐과 온유

인문학과 철학

by HtoHtoH 2025. 10. 1. 20:34

본문

군자의 마음가짐과 온유
군자의 마음가짐과 온유

군자삼락과 배움의 기쁨

군자라는 말은 '논어'의 첫 편에 해당하는 편에서 처음 언급되고 있다. 그 첫 문구는 군자삼락으로도 잘 알려진 배움의 기쁨과 도반이 함께하는 기쁨, 그리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고 홀로 즐거워할 수 있는 기쁨이 그것이다. 원문의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배우고 때에 맞춰 익히니 즐거운 일 아닌가?, 벗이 있어 멀리서 스스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배우고 익히는 기쁨과 벗이 찾아오는 기쁨, 그리고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않고 홀로 기뻐할 수 있는 이 세 가지를 군자삼락이라 했는데, 모두 인과 예를 실천하려는 첫 출발로서, 그것은 배우고 익히는 일에서 시작됨을 말하고자 했다. 공자의 학문적 기초가 '인의예지'였다면 그것을 기초로 한 도반의 만남은 더욱 기쁜 일이고, 인의예지를 실천함에 있어 알아주는 이 없어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참으로 군자답다는 말을 우리는 가슴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군자의 마음가짐: 알아주지 않음에 화내지 않기

참으로 군자다운 모습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드러난다. 오히려 공자는 "남이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라"고 말한다. 군자는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문제에 연연하여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알아주지 못한 점에 대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자신의 무능과 부덕에 대해 절치부심해야 한다. 그리고 공자는 계속해서 말한다. "군자는 자기의 무능을 병으로 여기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병으로 여기지 않는다." "군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서 구하는 자이지, 소인처럼 남에게서 구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의 도와 예수의 산상수훈: 팔복과 온유의 교훈

이렇듯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를 내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에 걸맞은 예수의 이야기가 있다. 군자에 대한 공자의 이야기가 주로 제자들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듯이, 예수도 제자들에게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 덕목으로서 '복이 있는 사람' 에 대한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들려준 이 교훈을 일러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데, 가히 이 교훈은 군자의 도리에 관한 교훈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예수는 산 위에서, 여덟 가지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교훈을 주는데, 이른바 '팔복'을 선언하고 있다. 그 여덟 가지 복 가운데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했다. 이 짧은 표현 속에서 우리는 온유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유라는 한자어는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갈대처럼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이라는 '마음의 땅'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이미 그 마음속에 내재된 내면의 기쁨이라는 열락이 있기 때문에 외부적인 시선이나 인정에 좌우되지 않는다.

 

온유한 자의 마음의 땅: 내면의 평화와 천국

군자는 인을 실현하는 것을 내면의 기쁨으로 여기고 만족하며 충만하듯이, 성도는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인정 여부에 지나치게 민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온유한 자'는 함부로 성내지 않는 자다. 크고 작은 일에 화를 잘 내는 것은 소인들이나 하는 경우다. 이른바 감정의 통제,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라 수양을 통해 얻어진다. 경쟁 사회에서 현대인들은 특히 감정이 메말라 있다. 툭하면 감정이 상하여 화를 내고 다툼을 일으키며,  심하면 마치 헐크처럼 변하여 살인까지 저지르는 무서운 폭군처럼 변해간다. 개인적 분노가 집단화되면 집단과 집단이 서로 싸우게 되고, 더 나아가 민족이기주의에 이르게 되면 국가 간에도 싸움을 일으킨다. 이렇듯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경우는 끝내 분쟁을 일으키게 되며, 분쟁의 결과는 참담한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예수는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다. 여기서 땅은 무엇일까? 오늘날 부동산 투기로 얻을 수 있는 졸부의 땅일까? 아니면 전쟁을 통해 강압적으로 빼앗은 영토를 이르는 말일까? 예수가 말하는 땅의 이미지는 천국의 이미지일 것이다. 지구촌 전체를 자기의 소유로 삼는다 해도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는 사람은 이미 군자도 아니고 성도도 아니다. 외부의 조건 없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스스로 평화를 누리는 자는 어디에 있으나 그곳이 천국이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그만큼 마음의 영토가 광활해지는 법이다.

 

인정욕구와 겸손의 길: 어린아이의 비유

미국의 행동주의 심리학자 아브라함 매슬로우에 의하면 인간은 욕구충족의 5가지 단계를 밟는다고 한다. 생리적 욕구에서 시작하여, 안전의 욕구, 소속감의 욕구, 그리고 인정의 욕구를 거쳐 마지막 자아실현의 단계에 이르는 욕구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인정의 욕구를 생각해 볼 때, 사람은 누구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심리적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을 공자는 이미 2500년 전에 간파하고 제자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쳤다. 이는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에게 "천국에서는 누가 더 큽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해 예수는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태18:2-4)."

 

군자와 성도의 내면적 숭고함: '온'의 의미와 선택

서로 큰 자로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오히려 어린아이의 비유를 통하여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와 온유한 자를 천국에서는 큰 자로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군자의 덕목도 이와 같이 겸손하고 온유한 자의 몫일 것이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화를 내는 사람은 참으로 군자답지 못할 뿐 아니라, 소인의 행동이 아닐 수 없다. 화는 도리어 더 큰 화를 초래할 뿐이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남을 알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부덕함을 오히려 탓하는 것이 군자와 성도가 할 일이다. 물론 당나라 왕발이 친구와 헤어질 때 한 유명한 말처럼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하늘 저 끝도 이웃과 같다"는 기쁨이 어찌 없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군자나 성도의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산속에 고요히 피어있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처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홀로 자신만의 아름다움으로도 충분히 넉넉한 내면의 숭고함이 빛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한자로 '성낼 온'의 뜻은 마음에 불평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뜻하고, '온유'는 온후하고 유순함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의 '온'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닌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순수하고, 익히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온'의 편에 서야 할까.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