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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 공자와 예수가 말한 가르침 속에서

인문학과 철학

by HtoHtoH 2025. 10. 3.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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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바라보는 두 지혜의 시선

가난은 저주이기도 하지만 축복일 수도 있다. 기아에 굶주릴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가난은 분명 고통스러운 저주다. 그러나 역설로 들릴지 모르지만 가난해도 사악함에 물들지 않는다면 그 가난은 차라리 축복이다. 다시 말해 배부른 도둑보다 배고픈 의인이 낫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과연 어떤 사람이 굶어 죽을지언정 의로움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저주스러운 가난을 극복한 것일까? 중극에는 지금 13억을 넘어 14억에 이르는 인구가 살고 있으며, 세계 무역량으로 볼 때 경제 규모가 이제는 미국과 일본 다음의 대국이다. 그러나 국민 개인의 소득 수준을 따져보면 경제 규모에 비해 아직 미천하다. 부가 그만큼 편중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 끝없이 도시로 이주하고 있지만 아직도 전 인구의 9억이 농촌에 살고 있다. 과연 가난한 농촌 사람들과 부유한 도시인들의 행복 지수는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우리가 빈국으로 여기고 있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나 티베트 산간 지방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설문 조사 결과가 있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부가 반드시 마음의 행복과 직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에도 예수가 살았던 시대에도 부자와 가난한 자는 있었다. 인간이 원시 수렵생활 이후에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정착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더욱 강화되었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못가진 자들은 지배자나 가진 자들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배와 착취가 강화되고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못 가진 자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마저 빼앗기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봉건사회를 지나 사회,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피할 수 없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제도적인 장치 아래에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는데, 이는 지구촌 전체가 안고 있는 세계화시대의 한 병폐이기도 하다. 거기에 소비의 발달로 환경오염 문제와 생태계의 파괴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던 사람들이 생존경쟁에서 밀려나면서 거리로 내몰리게 되고, 일부 부랑자가 된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예수가 보여준 가난 속의 복됨

부자와 거지의 상황에 대해 예수는 이들 두 사람 사이에서 천국과 지옥을 암시한다. 가난한 거지를 배려해 주지 못하는 부자의 태도에 대한 심판은 엄격하다. 이 두 사람이 죽어 나타난 결과는 천국과 지옥이었다. 가난한 사람들 앞에 예수가 나타나서 외친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예수의 이 말을 듣는 일차적인 청중은 제자들이었다. 이 제자들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재산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도 했거니와, 대부분은 가난한 갈릴리 농어촌 출신들이었다.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이 이들 제자들 뿐만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듣는 모두에게 은밀히 확대되고 전달되어 갔다. 실제로 소작농들을 포함한 갈릴리 민중들은 그들이 당면한 가난한 현실을 타개해 줄 현실적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누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의 기자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복음 선포 내용을 약간 변형된 형태로 전하고 있다. 이를테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요"라고 말한다. '심령', 즉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말하는데,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와는 대조를 이룬다. 누가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직접적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마태는 상대적으로 부유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이라는 신학의 일반적인 해석이 있다. 이렇듯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모두에게 '마음'이 가난해져야 함은 절실하다. 바로 이 부분은 공자가 말하는 군자의 이상과 비교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한 군자의 마음과 생활

가난함에 대한 공자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공자는 군자의 이상으로 이렇게 말한다. "먹는 일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실천에는 민첩하고, 말에는 신중해야 한다. 도에 이르러 바르게 행동한다면 가히 배움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자의 도리와 이상으로서 인과 예를 실천하기 위해 배우는 사람이 배부름이나 추구하고 좋은 잠자리를 추구하는 등, 의식주에 집착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밖에도 군자의 도리로서 언행의 문제를 말하는데, 말보다 실천적 행위가 우선되어야 할 것과 그에 따른 언어는 책임성을 고려하여 도에 걸맞게 신중하고 바르게 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참다운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공자는 물질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도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먹는 일에 급급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데 있어서 먹고 마시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음은 너무도 자명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먹을 것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삶인가. 당장에 먹을 것이 없는데 무슨 도를 논한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굶어 죽을지언정 도의 실천을 외면하고 살 수 없다는 것이 군자의 도리다. "밭을 부지런히 갈면 먹을 것이 나오고, 부지런히 익히고 인의 수양을 쌓아 가면 나라의 녹을 먹을 수는 있지만." 이말은 군자는 도를 중시하는 것이지 가난하다고 불평하거나 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자처하며 백성들의 궁핍한 삶을 외면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는 아니다. 오히려 군자는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정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양심과 청결한 마음이 이끄는 길

먹을 것, 병력, 백성의 신뢰 이 세 가지는 나라가 존립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이다. 특히 전쟁이 심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이 세 가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백성이 임금을 신뢰하는 것이며, 그다음이 식량이고 그다음이 병력이라고 공자는 말한다. 먹을 것이 떨어져도 임금에 대한 백성의 신뢰가 있다면, 다시 힘을 합쳐 먹을 것을 생산할 수 있지만, 임금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난리가 나게 되고 나라는 망하게 된다. 임금에 대한 백성의 신뢰가 있으면 천하에 도가 서기 마련이다. "천하에 도가 행해지는데도 가난하다면 그것은 부끄러움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천하에 도가 무너졌는데 부귀를 누리는 것도 부끄러움이 된다."라고 공자는 말한다. 도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홀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으며, 난리난 재난 그리고 약탈의 시대에 어찌 힘없는 민중이 가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많은 왕이 혁명이나 반란에 의해 처단되거나 살해되었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도 이를 잘 입증해 주고 있다. 먹을 것이 경제라면, 병력은 국방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백성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지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예수 시대에도 정치가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로마의 지배하에서 갈릴리 민중은 이중 삼중의 수탈 속에 민생고를 겪어야 했다. 무엇보다 가난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의 일갈은 과연 얼마나 효력이 있는 것이었으며, 의미 있는 외침이었을까. 예수의 발언은 언제나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와 미래적 역사의 심판을 동시에 내다보고 있는 자에 대한 외침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공자가 현재적 이상정치의 실현을 꿈꾸면서 그것을 실현할 자들로서의 '군자'를 이상적 인간의 모델로 생각했다면, 예수는 제자들과 더불어 현재적 고통을 넘어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지금, 여기에서' 앞당겨 보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나라를 표방하는 외침이기도 하다. 누가의 표현대로,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면, 부자는 마태의 표현대로 '마음'을 가난하게 함으로써 천국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가난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 공자와 예수가 말한 가르침 속에서
가난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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