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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학습의 교차로: 행동 발달의 유전적·환경적 결정론

생명과학

by HtoHtoH 2026. 2. 11.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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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행동은 살아있는 유기체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가장 역동적인 방식이다. 과거 생물학계에서는 행동이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본능'인가, 아니면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습관'인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현대 행동유전학과 동물행동학은 이 두 요소가 결코 독립적이지 않음을 명확히 한다. 행동은 유전적 프로그램이라는 설계도와 환경이라는 건축 자재가 만나 완성되는 결과물이다. 특정 유전자는 특정 행동을 유발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하고, 환경은 그 잠재력이 실제로 발현될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수정될지를 결정한다. 본 고에서는 유전적 구성과 환경적 요인이 동물의 행동 발달에 어떻게 통합적으로 작용하는지, 분자 수준에서 개체군 수준에 이르기까지 학술적으로 심층 분석한다.


1. 경험과 행동: 환경이 빚어내는 행동의 표현형

유전자가 행동의 기본 골격을 제공한다 하더라도, 동물이 성장 과정에서 겪는 경험은 그 행동의 최종 형태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변수가 된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생물학자들은 교차 양육(Cross-fostering) 실험을 빈번하게 사용한다.

1-1. 교차 양육 실험을 통한 환경 영향 측정

교차 양육은 한 종의 새끼를 다른 종이나 다른 행동 특성을 가진 부모 밑에서 키우는 실험 방식이다. 이를 통해 행동의 차이가 유전적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양육 환경 때문인지를 분리해낼 수 있다.

  • 흰발생쥐와 캘리포니아생쥐의 사례: 캘리포니아생쥐는 공격성이 강하고 부성애가 깊은 반면, 흰발생쥐는 덜 공격적이고 새끼를 덜 돌본다. 실험 결과, 캘리포니아생쥐의 새끼를 흰발생쥐 부모 밑에서 키우면 공격성이 줄어들고 부성애도 약해지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이는 성체 동물의 사회적 행동이 어린 시절의 양육 경험에 의해 크게 좌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1-2. 후성유전학적 관점에서의 경험

단순한 학습을 넘어, 경험은 유전자의 발현 패턴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양육 경험이 부족한 쥐는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는 유전자의 메틸화 상태가 달라져, 평생 동안 스트레스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이는 환경적 경험이 '유전자-환경 상호작용'을 통해 생물학적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다.


2. 조절유전자와 행동: 복잡한 행동을 지휘하는 마스터 스위치

행동은 대개 수많은 유전자가 관여하는 다인자적 특성이지만, 때로는 단 하나의 조절유전자(Regulatory gene)가 복잡한 일련의 행동 단계를 총괄 지휘하기도 한다.

2-1. 초파리의 구애 행동과 fru 유전자

초파리 수컷은 암컷을 만나면 쫓아가기, 앞다리로 두드리기, 날개 떨기(구애 노래), 생식기 접촉 등 고도로 정형화된 구애 행동을 순차적으로 수행한다.

  • 마스터 스위치의 역할: 이 복잡한 행동 사슬은 '프루틀리스(fruitless, fru)'라고 불리는 단일 조절유전자에 의해 제어된다. fru 유전자는 성별에 따라 다르게 스플라이싱(Splicing)되어 발현되는데, 수컷 형태의 fru 단백질이 만들어지면 초파리의 뇌는 구애 행동을 수행할 수 있는 신경 회로를 구축한다.
  • 성별 역전 실험: 유전 공학을 통해 암컷 초파리에게 수컷 형태의 fru 유전자를 발현시키면, 암컷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암컷에게 수컷과 동일한 구애 행동을 수행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 이는 복잡한 사회적 행동조차 특정 핵심 유전자의 명령 체계 아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3. 자연개체군에서의 유전적 요인에 의한 행동 변이

동일한 종이라 하더라도 서식 환경에 따라 유전적 구성이 달라지며, 이는 행동의 변이로 이어진다. 자연 선택은 특정 환경에 유리한 행동 형질을 보존하며, 이는 종 분화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3-1. 사례연구: 지어귀새(Blackcap)의 이주 패턴 변이

유럽에 서식하는 지어귀새는 겨울철에 따뜻한 곳으로 이주하는데, 개체군에 따라 이주 방향이 유전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 독일과 오스트리아 개체군의 차이: 독일 남서부의 지어귀새는 남서쪽(스페인 방향)으로 이동하는 반면, 오스트리아의 개체군은 남동쪽(터키 방향)으로 이동한다.
  • 교배 실험: 이 두 개체군을 교배하여 태어난 새끼들은 부모의 중간 방향인 남쪽으로 이주하려는 성향을 보였다. 이는 이주 방향이라는 복잡한 행동 정보가 유전자에 코딩되어 있으며, 자손에게 유전됨을 입증한다. 최근 영국으로 이주하는 새로운 경로가 등장한 것 역시 환경 변화에 따른 유전적 선택의 결과로 해석된다.

3-2. 사례연구: 가터뱀(Garter Snake)의 먹이 선택 변이

북미 서부에 서식하는 가터뱀은 서식지에 따라 먹이 선호도가 극명하게 갈린다.

  • 해안가 vs 내륙: 해안가에 사는 가터뱀은 민달팽이를 주식으로 삼지만, 내륙에 사는 가터뱀은 민달팽이를 먹지 않고 개구리나 물고기를 선호한다.
  • 화학 수용의 유전적 차이: 태어나서 한 번도 먹이를 먹어본 적 없는 새끼 뱀들에게 민달팽이 냄새를 맡게 했을 때, 해안가 개체군의 새끼들만이 민달팽이 냄새에 혀를 낼름거리며 반응했다. 이는 민달팽이의 화학 성분을 인식하는 감각 수용기의 민감도가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음을 의미하며, 먹이가 풍부한 환경에 적응한 결과다.

지어귀새


4. 단일 유전자좌위 변이의 영향: 미세한 차이가 만드는 큰 변화

때로는 유전자 지도의 아주 작은 변이가 동물의 사회적 구조나 생존 전략을 완전히 바꾸어 놓기도 한다.

4-1. 초파리의 먹이 찾기 유전자 (for)

초파리 유충은 먹이를 찾을 때 많이 움직이는 '방랑형(Rover)'과 적게 움직이는 '정착형(Sitter)'으로 나뉜다. 이 차이는 단 하나의 유전자좌위인 '포레이징(for)' 유전자의 대립유전자 차이에서 기인한다.

  • 진화적 안정 전략: 먹이가 부족하고 개체 밀도가 높은 환경에서는 방랑형이 유리하고, 먹이가 풍부한 환경에서는 정착형이 에너지를 보존하는 데 유리하다. 자연은 이 두 유전적 변이를 환경에 따라 적절히 유지하며 개체군의 생존율을 높인다.

4-2. 들쥐의 사회성과 바소프레신 수용체

일편단심으로 짝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프레리들쥐(Prairie vole)와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목초지들쥐(Meadow vole)의 차이는 뇌 속의 바소프레신 수용체(V1a receptor) 발현 양 차이에서 비롯된다.

  • 유전자 삽입 실험: 난잡한 목초지들쥐의 뇌에 프레리들쥐의 바소프레신 수용체 유전자를 삽입하여 발현량을 높였더니, 목초지들쥐가 갑자기 파트너와 강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일편단심' 행동을 보였다. 이는 단일 유전자의 발현 수준 변화가 동물의 사회적 시스템(단혼제 vs 다혼제)을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사례다.

결론: 본능과 환경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유전적 구성과 환경적 영향 중 어느 하나가 절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명의 복잡성을 간과하는 일이다. 유전자는 행동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고, 조절유전자는 그 실행을 위한 스위치 역할을 한다. 동시에 자연 선택은 환경에 적합한 유전적 변이를 보존하며, 개체는 자신의 생애 주기 동안 겪는 경험과 환경적 자극을 통해 유전적 프로그램을 미세하게 조정하거나 발현시킨다.

행동 발달에 대한 이러한 통합적 시각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동물의 행동은 고정된 운명이 아니라, 주어진 생물학적 자산과 환경적 기회가 빚어내는 역동적인 적응의 과정이라는 점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DNA 염기서열만큼이나 그 동물이 발을 딛고 서 있는 환경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결국 생명은 유전이라는 과거의 기록과 환경이라는 현재의 자극이 만나 미래의 생존을 그려나가는 예술적 투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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