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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에서 나눔으로 - 공자와 예수가 만난 사랑의 철학

천문학

by HtoHtoH 2025. 10. 24.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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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의 근원에서 피어나는 나눔의 원리

비움은 단순히 비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는 나눔의 신비로 이어지며, 또다시 그 나눔은 거대한 사귐의 율동으로 이어진다. 비움이 모든 인간 활동의 모체로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생산성의 근본 뿌리가 된다면, 나눔은 그 부리에서 나오는 줄기와 가지다. 그러므로 비움이 '체'라면 나눔은 '용'이다. 뿌리와 가지의 관계처럼 밀접한 비움과 나눔의 정신은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모든 사물의 본질이 연결성에 있다"고 한 말과도 통하는 내용이다. '너 없는 나, 그것 없는 이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연이 자연일 수 있는 까닭도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타자를 살리는 '상생의 원리'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사실 비움의 끝은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랑을 수반한다. 이른바 예수가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바친 행위라든가, 공자가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한 여러 조건 가운데서,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까지 내어줌"으로써 자비를 실현하는 "살신성인"의 경지를 말했던 그런 자세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제 '비움의 샘'인 사랑의 원천에서 나눔의 기적이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보자.

 

공자의 '박시제중'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만일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어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어찌 어진 사람일 뿐이겠는가? 반드시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박시제중'이다.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을 구제하라는 이 뜻은 어진 행실일 뿐만 아니라, 가히 성인의 경지라고 할 만하다는 공자의 극찬을 생각해 볼 때, '베풂' 곧 '나눔'과 구제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널리 베푸는 정신은 자기보다 남을 먼저 존중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어진 사람은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서게 하며, 자기가 통달하고자 하면 남을 먼저 통달하게 한다"고 했고,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예수가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고 했던 '황금률'의 격언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효와 우애에서 사회로 확장된 사랑

공자의 나눔정신은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공자 스스로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처럼, 배움을 서로 나누고 벗과 그 기쁨을 함께하는 것뿐만 아니라, "절약하면서도 남을 사랑하는 것" 또한 나눔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공자는 [서경]에서,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여, 이를 정사에 반영하라"고 한 것도 정치를 베푸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효도와 형제 우애를 정사에 반영하는 것 또한 큰 의미에서 나눔의 정치학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을 국책으로 제정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일을 제도적으로 확대해 가는 것은 사회 복지를 위한 정책의 일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디도미'

예수의 나눔 사상은 공자의 경우와 같이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 물질적 가치를 나누는 일 외에도 정신적 가치를 함께 나눈다는 뜻에서 그렇다. 정신적 가치에 대해서는 공자가 배움과 가르침을 베풀기를 중시했던 것과 같이 예수도 정신적, 영적 교훈을 가르치는일(디다케)에 일생을 쏟았다.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나눔 정신은 '주다'는 의미를 지니는 헬라어 '디도미'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디도미는 신약성서에서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와 밀접한 의미 연관을 지닌다. '주다'는 의미 자체가 사랑의 정신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디도미' 정신, 즉 나눔 운동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적 나눔, 둘째는 정신적, 영적 가치의 나눔, 셋째는 자기 자신을 내어줌이다.

물질적 가치의 나눔 운동은 특히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과 함께 종종 수행된 '밥상공동체' 운동에서 분명해 진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적 이야기'로부터 창녀와 세리, 혹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던 죄인과 소외받던 자들과 함께 나눈 식탁공동체가 대표적인 경우다. 정신적, 영적 가치의 나눔은 하나님 나라에 기초한 종말론적 윤리적 교훈을 강화하는 데서 드러난다. 예수의 수많은 비유와 가르침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결정적 가치로서의 사랑의 내어줌이 바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과 같이,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희생적 사랑의 경우다. 이 같이 죽음으로써 이웃을 살리는 사랑의 내어줌은 공자가 말하는 '살신성인'의 경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비움에서 나눔으로 - 공자와 예수가 만난 사랑의 철학
비움에서 나눔으로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가 빈들에 나가아서 병자를 고쳐주기도 하다가 저녁이 되어 먹을 것이 없을 때, 제자들이 먹을 것을 찾아 마을에서 사 먹기를 종용하자, 예수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한다. 제자들은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그것을 가져오게 한 후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니,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였다." 이른바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예수를 추종하는 원시 공동체의 나눔 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이적설화의 배경과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현재 있는 것을 함께 '나눌 때'에 기적 같은 현실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나눔의 기적'이다.

 

사랑의 완성

이상에서 우리는 공자와 예수의 나눔 사상을 각각 살펴보았다. 공자의 '살신성인'과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나눔 운동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의 나눔이 어디에 있겠는가. 재물을 나누는 행위도 고귀하지만,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는 행위는 가히 인을 이루고 남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을 구제하는 '박시제중;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성인 혹은 온전한 인간처럼 목숨을 내어 줄 정도의 각오는 없다고 하더라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실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함께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작은 것이라도 내어 놓는 정신에 있다. 국뿐 아니라 그 어떤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다. 마음에서 기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