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계는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생명을 보호하는 정교한 방패지만, 이 시스템이 균형을 잃으면 그 자체로 치명적인 병의 원인이 된다. 면역 반응이 너무 강하거나, 방향을 잘못 잡거나, 혹은 적절히 작동하지 못할 때 생체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또한 병원체들은 생존을 위해 이러한 면역계의 감시를 피하거나 아예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본 글에서는 면역계의 기능 손상이 일으키는 다양한 질환들과 병원체의 회피 전략, 그리고 면역과 암의 사투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1. 면역 반응의 오작동: 과도함, 빗나감, 그리고 약화
면역계의 핵심은 '자기(self)'와 '비자기(non-self)'를 정확히 구별하고 적절한 강도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 조절 기전이 무너졌을 때 발생하는 질환들은 현대 의학의 주요 난제들이다.
1-1. 과도한 면역 반응: 알레르기(Allergy)
알레르기는 먼지, 꽃가루, 특정 음식물 등 실제로는 해롭지 않은 외래 항원에 대해 면역계가 불필요하게 과장된 반응을 보이는 현상이다. 이러한 항원을 알레르겐(allergen)이라 한다.
발생 기전: 알레르겐에 처음 노출되면 B세포는 IgE 클래스의 항체를 과잉 생산한다. 생성된 IgE는 결합조직 내 비만세포(mast cells) 표면에 결합한다. 이후 같은 알레르겐이 다시 침투하여 비만세포의 IgE와 교차 결합하면, 비만세포 내부의 과립이 터지면서 히스타민(histamine)과 같은 염증 매개 물질이 대량으로 방출된다.
증상과 위험성: 히스타민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점액 분비를 촉진하여 콧물, 재채기, 가려움증을 유발한다. 가장 위험한 형태는 전신적인 급성 과민 반응인 아나필락시스 쇼크(anaphylactic shock)로, 급격한 혈압 저하와 기도 수축을 일으켜 수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
1-2. 자신을 향한 면역 반응: 자가면역 질환(Autoimmune Diseases)
자기관용(self-tolerance) 시스템이 고장 나 면역계가 자신의 세포나 분자를 외부 항원으로 오인하여 공격하는 상태다.
대표적 사례:제1형 당뇨병: 면역계가 인슐린을 생산하는 췌장의 베타 세포를 파괴한다.
류마티스 관절염: 관절의 연골과 뼈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여 만성적인 염증과 변형을 일으킨다.
다발경화증(MS): T세포가 신경세포의 수초(myelin sheath)를 공격하여 신경 전달에 장애를 유발한다.
홍반성 루푸스(SLE): 핵산이나 단백질 등 광범위한 자기 분자에 대한 항체가 형성되어 전신 장기에 염증을 일으킨다.
원인: 유전적 요인과 더불어 특정 바이러스 감염이나 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억제 T세포의 기능이 약화될 때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 약화된 면역 반응: 과로, 스트레스 및 면역결핍증
면역계는 신경계 및 내분비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심리적·물리적 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다.
과로와 스트레스: 지속적인 스트레스는 부신피질에서 코르티솔(cortisol) 분비를 촉진한다. 코르티솔은 염증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림프구의 증식과 활성화를 저해하여 면역력을 떨어뜨린다. 시험 기간에 감기에 잘 걸리거나 입반늘이 돋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면역결핍증(Immunodeficiency): 면역계 구성 요소 중 하나 이상이 결여되거나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다.
선천성 면역결핍: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중증 복합 면역결핍증(SCID)은 B세포와 T세포 모두가 기능하지 못해 평생을 외부와 격리된 '플라스틱 거품' 안에서 살아야 하는 비극을 초래한다.
후천성 면역결핍: 약물, 방사선 치료, 영양 결핍, 혹은 특정 감염에 의해 발생한다. 현대에서 가장 흔한 원인은 노화와 더불어 후술할 HIV 감염이다.
2. 병원체의 생존 전략: 후천성 면역계의 회피와 공격
면역계가 진화하는 동안 병원체들 역시 그 감망을 빠져나가기 위한 기발한 전략들을 진화시켜 왔다.
2-1. 항원 변이(Antigenic Variation)
병원체가 자신의 표면 항원(에피톱)의 구조를 수시로 바꾸어 면역 기억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전략이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독감 바이러스는 매년 유행하는 항원 결정 부위가 바뀐다. 항원 소변이(Antigenic drift)를 통해 조금씩 변하거나, 서로 다른 바이러스 간의 유전자 재조합을 통한 항원 대변이(Antigenic shift)를 일으켜 면역계의 추적을 따돌린다.
수면병 기생충: 트리파노소마(Trypanosoma)는 수백 개의 항원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면역계가 하나의 항원에 적응할 때쯤 표면 단백질을 완전히 교체하여 증식을 이어간다.
2-2. 잠복(Latency)
항원을 발현하지 않은 채 숙주 세포 내부에 숨어 면역계의 눈을 피하는 방식이다.
헤르페스 바이러스: 감염 후 신경절 등에 자신의 DNA를 숨긴다. 이때는 바이러스 단백질이 생산되지 않아 T세포가 감염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후 숙주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면역력이 떨어지면 다시 활성화되어 병변을 일으킨다.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가 수십 년 뒤 대상포진으로 나타나는 것도 같은 원리다.
2-3. 면역계의 사령부를 타격하다: HIV와 AIDS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는 면역계의 핵심인 도움 T세포를 주 표적으로 삼아 공격하는 가장 치명적인 회피 전략을 구사한다.
공격 기전: HIV 표면의 gp120 단백질이 도움 T세포의 CD4 수용체와 결합하여 침투한다. 이후 바이러스는 T세포 내에서 증식하며 숙주 세포를 파괴한다.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증)로의 이행: 도움 T세포의 수가 일정 수준 이하(혈액 1mm³ 당 200개 미만)로 떨어지면 체액성 면역과 세포 매개 면역이 모두 붕괴한다. 환자는 일반인에게는 무해한 곰팡이나 약한 세균에도 치명적인 감염(기회감염)을 일으키거나 드문 종류의 암(카포시 육종 등)에 걸려 사망하게 된다.
회피의 정점: HIV는 역전사 과정에서 돌연변이가 매우 잦아 항원 변이가 극심하며, 숙주 게놈에 잠복하는 특성까지 갖추고 있어 완전한 제거가 매우 어렵다.
HIV
3. 암과 면역: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
암세포는 본래 자기 세포였으나 유전자 돌연변이를 통해 무한 증식하는 특성을 갖게 된 '변절자'다. 면역계는 이들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면역 감시(Immune Surveillance) 기능을 수행한다.
3-1. 면역 감시와 사멸
세포가 암세포로 변하면 표면에 비정상적인 단백질(암 항원)을 전시하게 된다. 자연살생세포(NK 세포)와 세포독성 T세포는 이러한 이상 징후를 감지하여 암세포를 파괴한다. 실제로 우리 몸에서는 매일 수많은 잠재적 암세포가 생성되지만, 대부분은 면역계에 의해 조기에 진압된다.
3-2. 암세포의 면역 회피(Immunoediting)
암이 임상적으로 발견된다는 것은 면역 감시를 통과했다는 뜻이다. 암세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면역계를 속인다.
항원 은폐:MHC I 분자의 발현을 줄여 T세포가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면역 억제 물질 분비: 주변에 면역 반응을 억제하는 시토카인을 뿌려 T세포의 활성을 잠재운다.
면역 관문(Immune Checkpoint) 활용: 정상 세포가 면역계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브레이크' 신호(예: PD-L1)를 암세포가 악용하여 T세포의 공격을 차단한다.
3-3. 현대 의학의 반격: 면역 항암제
암세포의 회피 전략을 역이용하는 치료법이 각광받고 있다.
면역 관문 억제제: 암세포가 T세포의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도록 차단하여 T세포가 암세포를 공격하게 만든다(예: 키트루다).
CAR-T 세포 치료: 환자의 T세포를 추출하여 특정 암세포를 더 잘 찾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뒤 다시 주입하는 맞춤형 치료법이다.
결론: 조화와 균형의 생물학
면역계는 생명이라는 성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군대이지만, 그 총구가 안으로 향하거나(자가면역), 사소한 소란에 과잉 대응하거나(알레르기), 혹은 적의 위장술에 속아 넘어가면(암, HIV) 성은 무너지고 만다. 면역계의 기능 손상은 단순히 방어력의 상실을 넘어 개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복합적인 질환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살펴본 알레르기의 메커니즘, HIV의 교묘한 사령부 타격, 암세포의 위장술은 면역학이 왜 단순한 방어의 학문이 아닌, 생명 유지의 정교한 균형을 다루는 학문인지를 보여준다. 현대 의학은 이제 결핍된 면역을 보충하고, 엇나간 면역을 바로잡으며, 암세포의 위장을 벗겨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면역계의 빛과 그림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인류가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